게임·독서까지 '옥외광고판의 진화'…세상 참 좋아졌네


관광스토리텔링, 그 빛을 발한다.
“도봉산 둘레길 옆으로 연산군 묘와 부인 거창 신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조선 10대 임금이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1476~1506)의 묘를 도봉구의 관광명소로 가꿀 것이라며 28일 이렇게 말했다. 연산군은 TV드라마나 영화 등 역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인물로,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는 문화역사 탐방 코스로 최고라는 이야기다.
| ▲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2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역에 위치한 연산군 묘 등 문화재를 적극 활용해 관광 명소로 키우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
●5000만원 들여 연산군묘 인근 정비 문제는 연산군 묘가 왕릉으로 국가지정 문화재인데도, 공장과 식당 등이 바로 인접해 주변 환경이 불량하고, 차량 진입로가 좁고 주차공간이 없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상반기에 5000만원을 들여 주변을 정리할 예정이다. 유적지를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한 뒤 주변 문화유적지와의 동선을 연계하기로 했다. 주차장과 화장실, 전시실 등 편의시설도 확충한다. 연산군 묘 주변에는 파평 윤씨 일가가 600년 전 정착하면서부터 이용했다는 원당샘과 서울시 보호수 1호인 830년 수령의 방학동 은행나무가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이곳에 불이 나면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다는 일화도 있다.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양효공 안맹담의 묘도 자리했다. 정의공주와 부군의 묘는 서울유형문화재 제50호다. 원당샘은 복원돼 지난 13일 준공식을 가졌다. 최근 도봉구에 있는 이들 유적지가 주목받는 것은 지난 6월 개통한 북한산 둘레길 도봉 구간 20구간(왕실묘역 길)이 바로 옆으로 펼쳐진 덕분이다. 이들 유적을 잘 관리하면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둘레길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도 괜찮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도봉의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할 수 있다고 이 구청장은 판단한다. 이 구청장은 “특히 한글 창제의 숨은 공로자로서 정의공주를 재조명할 수 있는 대표적 자원”이라면서 “도봉구의 가치와 긍지를 높이는 일에 이들 자원이 활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배 김근태 前대표 투병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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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그리고 플레이스 스토리텔링
스토리를 지닌 기억은 쉽게 떠오른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은 스토리 덩어리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스토리로 기억하고 스토리로 살아가며 죽은 이후에는 남겨진 이들에게 스토리로 기억된다. 미국 영문학자인 존 닐(John D. Niles) 교수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공유하는 인간의 특성을 강조 하면서 ‘호모 나렌스(Homo Narrans)’라고 인간 존재를 ‘스토리’ 라는 관점에서 재정의하기도 했다. 스토리는 개인을 넘어 사회를 담는 우리의 역사이며 문화이고 또 정체성이다.
커뮤니티는 스토리를 갈구한다. 문자가 없던 고대로부터 스토리는 크고 작은 집단을 결속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 해왔다. 건국의 영웅들이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 신화(卵生神話)형태(예: 동명성왕 신화), 인고의 한계를 극복하고 건국의 영웅이 되는 신화(예: 단군신화)와 같은 커뮤니티 단결을 위한 스토리들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특정 사실(Fact)을 기억할 때 스토리로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스토리로 기억된 정보들은 사실의 나열보다 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장기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산, 나무꾼, 도끼, 산신령’ 이라는 사실적인 단어의 나열은 아무런 의미와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산 – 나무꾼 – 도끼 -산신령’의 의미를 연결해서 ‘산에 간 나무꾼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산신령을 만났다’는 이야기로 바꿔보면 사실들은 강력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결국 스토리는 개인을 커뮤니티의 역사 속에서 영원하게 하는 결정적인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여러 공간들은 다양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공간들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어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대신에 공간에 머무르고 그 후 떠난 사람들에 의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는 전해진다. 이렇게 머물고 지나간 사람들에 의해 장소에 대한 스토리가 탄생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꾸며지게 된다. 공간(Space)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이다. 반면 플레이스(Place, 장소)는 우리가 살고 머무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플레이스=인간화된 공간(Humanized Space)’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곽재구 시인의 작품 ‘사평역에서(1983)’는 ‘남평역’이라는 간이역을 배경으로 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시인의 서정적 묘사가 없었다면 이 역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무명의 간이역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남평역은 깊은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된다. 이와 같이 스토리텔링의 방법에 따라서 특정 공간에 의미를 담고 이 창조된 의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이 이야기(Story)를 통해 특정 공간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 결국 스토리를 통해 공간의 브랜드 가치를 만드는 과정이 바로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이다.
커뮤니케이션 관점의 플레이스 스토리텔링
커뮤니티가 탄생하고 삶의 기반이 되는 우리 주변의 공간들은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들을 담고 있다. 예컨대 한국 마을명의 유래는 보통 동일 지역에 살았던 선조들의 스토리에서 기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 하나의 예를 들자면, 서울 광진구에 소재하고 있는 ‘아차산’은 이조 명종대왕 당시 ‘홍계관’이라는 뛰어난 점술가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스토리를 담고 있다.
스토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어느 날 왕이 점술가에게 궤짝에 몇 마리의 쥐가 있는지를 맞출 것을 요구했다. 이 점술가는 궤짝에 세 마리의 쥐가 들어있다고 대답했지만, 궤짝에는 두 마리의 쥐만 있었다. 잘못된 예언을 한 점술가가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쥐가 있었다. 즉, 궤짝에는 세 마리의 쥐가 있었다. 점술가가 정확히 맞췄기 때문에 급히 형을 멈추려 했으나 ‘아차’ 하는 순간에 형장의 형집행관은 칼을 휘두른다. 삶과 죽음이 ‘아차’ 하는 순간에 결정된 스토리에서 유래한 지명인 ‘아차산’은 긴장(점술가의 예언이 틀림)- 긴장 해소 (사실은 예언에 맞았음)- 긴장(급히 형을 멈추라는 어명)- 긴장 해소(‘아차’ 하는 순간에 죽임을 당함)라는 두 번 반복되는 ‘긴장(Tension)- 긴장해소(Tension Reduction)’ 구조를 통해 매력적인 스토리를 전달한다.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은 특정 공간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 가치(Story Value)를 지닌 스토리에서 출발한다.이것은 발굴한 스토리를 다듬어낸다는 점에서 문학적이다. 또한 발굴한 스토리를 전략적으로 관리하고 마케팅 한다는 점에서 경영적이다. 마지막으로 스토리를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상세하게 표현해낸다는 점에서는 ‘디자인’적 이다
결국, 공간에 스토리를 창조하고 전달하며 확산시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면에서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의 창작자(Storyteller)와 수용자(Audience) 사이의 ‘대화’ 곧, 커뮤니케이션 관점(Communication Perspective)’을 따르게 된다. 우리가 스토리 메이킹(Story Marking)이라고 부르지 않고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스토리를 만들 뿐 아니라 적합한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은 커뮤니케이션을 주축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관리하는데 있어 마케팅, 문학, 그리고 디자인의 전문성을 폭넓게 수용하게 된다.
공간을 브랜드로 만드는 플레이스 스토리텔링
스토리의 5대 핵심은 1. 주인공인 대상(또는 인간 또는 사물), 2.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대상, 3. 시간의 흐름, 4. 주인공과 대상들이 관계하는 공간, 5. 시간과 공간 속 에서 주인공과 대상의 관계들(갈등 및 갈등 해소의 사건들)로 정리해볼 수 있다. 우리가 선호하는 소설, 영화, 게임 등의 창작물에는 공감할만한 좋은 스토리 구조가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성공한 공간은 대부분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은 위에서 언급한 5가지 요소 중 ‘공간’이 스토리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예 창작물의 스토리텔링과는 성격이 다르다.
문예 창작물을 위해 특정 공간이 의미 있는 장소로 부각되는 경우도 많지만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에 의한 좋은 결과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기획 된 플레이스 스토리텔링과는 성격이 다르다.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특정 공간을 의미 있는 장소로 변모시킨 좋은 사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2001)’의 영향으로 부산의 ‘자갈치 시장’이 이슈화 되었고 드라마 ‘모래시계(1995)’의 방영 후 정동진 해안이 관광명소가 된 것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흥행을 통한 관광 마케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콘텐츠 창작자가 공간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보다는 격동기 사회 속에 인물들의 갈등을 담아내는 공간적 맥락으로 특정 장소를 활용했기에 전략적인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또 위 사례들과 같이 우연에 의한 지역 활성화는 장기적 관점의 ‘플레이스 스토리텔링 전략’의 결여로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시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짐에 동시에 장소의 매력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공간이 의미 있는 장소로 영속되려면 만들어진 스토리 위에 크고 작은 부가적인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구전과 미디어를 통해 재창조되는 열린 구조여야 한다. 결국 플레이스 스토리텔링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서울 2호선과 흡사한 일본 동경 야마노테선의 핵심 역사인 시부야 역에는 견공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1920년대 동경대농학부 교수인 우에노 교수가 기르던 애견인 하치코를 기리기 위해 설치된 동상이다. 시부야 역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인을 마중나가던 충견 하치코는 주인이 죽은 이후에도 늘 그 자리를 맴돌며 주인을 기다렸고, 1935년 거리에서 방랑견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주인 마중 가기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1934년 건립된 위 동상은 당시 하치코 동상 건립창립회의를 통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건립되었다.
이렇게 하치코 동상은 시부야의 상징으로 영화, 소설, 동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미디어를통해 재창조되어 현재까지도 시부야 역 공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커뮤니티의 스토리를 상징적으로대변하고 있는 하치코 동상은 오늘도 무언의 스토리텔러(Storyteller)로 시부야 역에 영속적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가 없는 공간이라면?’ 이러한 무명의 공간을 위해서는 마치 백지에 새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의 스토리를 새롭게 개발해야 한다. 또 이렇게 창조된 특정 장소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선호할 수 있도록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의 창구를 만들어가야 한다. 1950년대 카리브 해에 있는 미국의 자치령 중 작은 섬인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그 규모가 작아 관광지라 불리지도 못했다. 1950년대 광고 회사인 오길비앤매더(Ogilvy & Mather)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무명의 섬을 이야기가 가득한 흥미로운 섬으로 새롭게 포지셔닝 했다. 당시 26세였던 젊은 사진사 엘리엇 어윈(Elliott Erwitt)의 신비로운 사진과 의문을 주는 듯한 매력적인 카피들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푸에르토리코는 현재까지도 세계인들에게 미지의 아름다운 섬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만큼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의 힘은 막강하다. 또 다른 사례로 스페인의 작은 공업 도시인 빌바오(Bilbao)는 관광과는 거리가 먼 황량한 공업도시였다. 이곳에 적극적으로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해서 세계인이 찾는 최고의 관광명소가 될 수 있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미술품이 아닌 미술관 그 자체를 보기 위해 빌바오를 찾고 있다. ‘메탈 플라워(금속으로 만든 꽃)’라는 별명을 지닌 미술관은 파격적인 건물 형태로 공업도시에 이색적인 스토리를 더하고 있다. 창의력은 이질적인 개념의 만남에서 생긴다는 원리를 통해, 실제 공간에 스토리를 담아 그대로 구연한 빌바오시는 이 순간에도 미술관의 스토리를 만나길 고대하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플레이스 스토리텔링과 디지털 미디어
스마트폰의 확산 및 무선인터넷의 보편화로 현대인들의 새로운 미디어 습관이 된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는 개개인들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소셜 네트워크의 공동 스토리로 확산 및 재생산해서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을 확대 발전시키고 있다. 구전된 커뮤니티의 스토리는 구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스토리를 전하는 매개자들에 의해 윤색되고 변형되면서 보완된 스토리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원형과 전혀 다른 스토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변형과 재창조의 과정은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흥미로운 측면이다. 최근 블로그(Blog) 및 소셜 미디어(Social Media)가 보편화되면서 늘어가는 공동창작(Collective Creation)또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라는 나눔의 흐름은 이제 커뮤니티의 가치를 담은 스토리들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비자들은 지인들이 방문한 장소에 대해 더 큰 가치를 두고 방문하려는 경향이 있다. 여행 정보지에 게재된 수십 장의 광고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유한 지인들의 방문기가 월등히 효과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셜 미디어는 플레이스 스토리의 전파에 매우 효과적인 채널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소셜 미디어 중에서 ‘위치 기반 소셜 미디어(Location Based Social Media)’는 향후 뉴미디어를 통한 플레이스 스토리텔링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 최대의 위치기반 소셜 미디어인 ‘포스퀘어(Foursquare)’는 사용자가 자신의 현재 위치를 계속 갱신하면서 친구들과 자신의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는 서비스이다. 본인이 특정 장소를 방문하고 온라인에 공유(Check-in)하면서 장소를 평가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공간에 대한 공동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확산되게 된다.
플레이스 스토리를 경영하라![]()
플레이스 스토리텔링(Place Storytelling)은 스토리라는 강력한 구조를 통해 공간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지역의 스토리를 발굴하고 발굴한 스토리를 통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특히 2000년 이후 국내에는 지역 브랜드 개발, 지방 특성화 활동에 힘입어 시작된 플레이스 마케팅(Place Marketing) 또는 스페이스 마케팅(Space Marketing)에 대한 접근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용어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특정 공간을 차별화 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도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었다. 이점에 대해필자는 ‘공감되는 스토리’가 결핍되었거나 만들어진스토리를 장기적 관점에서 대중에게 유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구체적으로 과거 마케팅 활동들은 특정 공간을 통하여 수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운 후,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전략 속에서 감성적인 스토리가 살아숨쉴 여백이 없었던 것이다. 또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결여로 공간에 대해 단편적이며 제한적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의미가 담긴 특별한 장소로 창조돼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투자대비 수익 극대화’를 강조하는 ‘경영, 마케팅’의 관점, ‘미학적 표현’을 강조하는 ‘공간 디자인의 관점, 공간의 ‘스토리’는 강조했으나 전략적 뒷받침이 부족한 ‘문학적 관점’, 모두 제한적인 접근으로 공간의 가치를 높이는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단기적 관점에서 스토리를 개발하고 활용한 이유로 플레이스 스토리의 가치가 빠르게 약화되고 종국에는 새로운 스토리를 개발해야 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 것 이다. 향후 소공간-지역사회-국가를 유기적으로 연결 해주는 흥미로운 스토리 개발과 장기적 브랜딩 관점에서의 스토리 경영을 통해 지역사회 또 나아가서는 한국의 국가브랜드에 가치를 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Professor of Business Administration and
Investors in Business Education Professor and
Professor of Advertising
Ph.D., Communications, University of Tennessee, 1990
M.A., Advertising,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1985
B.A., English Literature, Louisiana State University, 1981
Investors in Business Education Professor of Marketing, Department of Business Administration, University of Illinois, 2007-2011
Professor of Marketing, Department of Business Administration, University of Illinois, 2005-2011
Professor of Advertising, University of Illinois, 2005-2011
Professor, Campus Honors Program, University of Illinois, 2005-2011
Director, Illinois Summer Management Institute, Department of Business Administration, 2010
Provost Fellow, Committee on Institutional Cooperation Academic Leadership Program,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2010
Associate Professor of Marketing, Department of Business Administration, University of Illinois, 2000-2005
Associate Professor, Department of Marketing, Rutgers University, 1999-2000
Associate Professor, Department of Advertising, University of Illinois, 1996-1999
Appointed Associate Professor, Campus Honors Faculty, University of Illinois, 1997
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Advertising, Department of Advertising, University of Illinois, 1990-1996
Otnes, C., Crosby, E. , Kreuzbauer, R., Ho, J. 2009. Tinsel, Trimmings and Tensions: Consumer Negotiations of a Focal Christmas Artifact. In John F. Sherry, Jr., Eileen M. Fischer (Ed.), Consumer Culture Theory, 171-189. London: Routledge.
Otnes, C., Fischer, E. 2009. Are We There Yet? Co-Producing Success and Failure in Personal Training. In John F. Sherry, Jr., Eileen M. Fischer (Ed.), Consumer Culture Theory, 101-113. London: Routledge.
Otnes, C., Maclaran, P. 2007. The Consumption of Cultural Heritage among a British Royal Family Brand Tribe. In Robert Kozinets, Bernard Cova, and Avi Shankar (Ed.), Consumer Tribes: Theory, Practice, and Prospects, 51-66. Elsevier/Butterworth-Heinemann.
Invited Faculty Member, Association for Consumer Research Doctoral Consortium, 2008, 2012
Appointed Investors in Business Education Professor of Marketing, Department of Business Administration,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2007 to present
Treasurer, Association for Consumer Research, 2000-2011
Best Overall Conference Paper, American Marketing Association Summer Conference, 2009
Best Paper, Consumer Behavior Track, American Marketing Association Summer Conference, 2009
List of Teachers Ranked as Excellent,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1994-2004, 2006-2009
Conference on Contemporary Authenticity, Collaborative for Heritage and Museum Practices, UIUC, 2012
Co-Chair, Domestic Conference, Assn. for Consumer Research, 2011-present
Board Member, Journal of Consumer Research, 2003-2005, 2008-present
Board Member, Economia Aziendale Online (University of Pisa), 2008-2011
Board Member, Journal of Interactive Advertising, 2000-2011
Program Committee Member, Consumer Culture Conference, 2009-2010
Promotion and Tenure Review, University of Ottawa, 2008
Promotion Review, University of Richmond, 2008
Teaches courses in consumer behavior and promotions.
Primary area of interest is in the study of ritual-based consumer behavior (e.g., gift giving, weddings, Christmas planning), and how advertising and marketing both shape these rituals.
Brian Douglass Holloway (born July 25, 1959 in Omaha, Nebraska) is a former professional American football offensive tackle for the New England Patriots and Los Angeles Raiders from 1981 to 1988.
Brian Holloway was selected by the New England Patriots in the first round (19th overall) of the 1981 NFL Draft out of Stanford University. As a rookie in the strike-shortened 1982 NFL season, Holloway started 5 of 16 games. He became the starting left offensive tackle the following year, next to guard John Hannah, and missed only one start up to the end of the 1986 NFL season. In the 1982-83 NFL playoffs, the Patriots lost to theMiami Dolphins in a wild-card game.
They did not make the playoffs in 1983 and 1984 but did so in 1985. After beating the New York Jets in a wild-card game of the 1985-86 NFL playoffs, the Patriots beat the Los Angeles Raiders on the road in the divisional round with a strong running game, amassing 156 yards, 104 by running back Craig James behind Holloway and Hannah. The line then destroyed the Miami Dolphins' run defense on the road by accumulating 255 yards, 105 of them by James, winning the AFC title. However, they could not run over the legendary Chicago Bears defense of 1985 in Super Bowl XX, Holloway having a hard time with the formidably swift right defensive end Richard 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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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한국광고단체연합회가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6대 이기흥 회장, 8대 김석년 회장, 12대 이순동 현 회장, 10대 전응덕 회장, 11대 남상조 회장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물병자리출판사 <오직 할 뿐:내가 만난 숭산 대선사> |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몸에 의지하지 말라. 우리 모두 모르는 곳에서 왔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오직 모를 뿐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숭산 큰 스님은 재작년 11월에 입적하셨다. 눈 푸른 현각 스님을 통해 국내에 널리 알려진 숭산 큰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 해외포교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로 꼽힌다. 1970년대 미국에서 한국 이민자 중심의 포교에서 벗어나,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포교활동에 힘써 한국의 선불교를 널리 보급했기 때문이다. 입적 당시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위원이 보내온 추도 서신을 통해서도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숭산 대선사는 젊은 시절부터 전 세계에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고, 케임브리지 선원을 비롯해 각 나라에 100개가 넘는 선원을 건립해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고요를 심어줬다.”
<오직 할 뿐:내가 만난 숭산 대선사>(무량, 무심 외 지음)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숭산 스님의 제자들이 스승과의 만남을 추억하며 쓴 글들이다. 숭산 스님은 40여 년 한국의 선불교를 세계 각지에 포교한 이래 현재 세계 32개 국 120여 개 홍법원이 개설되어 5만여 제자들이 수행 정진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전통적인 한국 사찰 ‘태고사’를 건립하여 화제를 모았던 무량 스님, 전 화계사 국제선원장 무심 스님, 베트남 전쟁 세대로 반전운동을 하다 숭산 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한 대봉 스님, 흑인 인권운동을 하다 숭산 선사의 법문을 듣고 충격과 감동을 받고 출가한 무상 스님 등 제자들의 약력은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삶을 살다 출가한 제자들이 풀어 놓는 에피소드들 또한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다.
“반짝이는 눈과 스승다운 면모를 지닌 네모나고 단단한 모습을 한, 전적으로 선사의 모습 그대로였던 스님. 공항에서 나오는 버스 속에서 스님은 그냥 잠을 자 버렸고, 호텔 방에서는 룸서비스가 방정리를 하고 있는데도 잡지를 들고 툭툭 털어내기도 하셨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숭산 스님의 해외포교 초기시절로 가는 듯하다. 제자들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사 마하 거사난다, 잭 콘필드 등이 풀어낸 만남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에도 많은 독자가 있는 잭 콘필드는 숭산 선사를 이렇게 회상한다. “선사님의 모를 뿐인 마음과 우주적 에너지는 서양의 선(禪)에 특색과 영혼, 그리고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숭산 스님이 고봉 스님을 통해 치열한 수행과정을 겪으며 마지막 공안까지 막힘없이 대답하자, 고봉스님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책의 마지막 부분에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 숭산 스님의 일대기는 숭산 스님을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인생의 나침반을 얻는 기쁨을 주고, 숭산 스님을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는 다시 한 번 새로운 감동이 되어 줄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더라도, 오직 할 뿐!”
살다보면, 삶의 나침반 같은 것이 있어 헤매지 않게 좀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질 때가 있다.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이란 말로 요약되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이 담긴, <오직 할 뿐:내가 만난 숭산 대선사>와 함께 <오직 모를 뿐:숭산 대선사의 서한 가르침>을 통해 변화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자 하는 이들이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면 ‘안 아깝다, 이 책’이 될 것 같다.
권미경/물병자리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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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기 우리 사이트의 Ghost Image Making 게시판에서 사용한 "만능 부팅"이란 단어의 의미는 아래 인용에서 우리 사이트에서 억지로 사용한 단어인 "Universal Bootable"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즉, XP는 HAL 의존적이기에 HAL 유형이 다른 컴퓨터 간에는 Ghost로 백업한 이미지의 복원 시에 문제가 생기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무 HAL 유형 간의 컴퓨터에서도 문제 없는 부팅을 보장하기 위한 방도로 고안한 것이 "Universal Bootable" Ghost Image Making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새로운 OS인 Windows 7의 릴리스로 이미 세월이 무상하여 XP는 지난 일로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좌우지간에 컴퓨터를 새로 장만한 경우나 기존 사용하던 하드 디스크를 다른 컴퓨터에 장착 시에는, 특히 칩셋이 다른 메인보드를 사용하는 컴퓨터로 옮기는 경우에는, 의당 Windows XP는 새로 설치하여야만 한다는 거의 고정 관념을 허문 것이 "Universal Bootable" Ghost Image Making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MS의 문서에서와 같이 더 이상 "기술적 제한"이 없어진 것으로만 여겨 앞으로는 "HAL 유형"이 달라 Ghost로 백업한 이미지를 다른 컴퓨터에 복원하였을 때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슬슬 메이커에서 출하하는 컴퓨터에 Windows 7을 설치한 상품들이 일반화되어 사용자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래에 우리 사이트 회원 두분이 Q&A 게시판에 질문한 내용에서와 같이 Ghost로 백업한 이미지를 다른 시스템에서 복원하였을 때에도 역시나 문제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제 Windows 7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려는 사용자가 늘어남에 따라 앞으로 이러한 Windows 7의 Ghost 이미지 작성과 복원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사한 문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운영자도 Windows 7의 베타 테스트를 위한 지난 날의 오랜 눈요기 수준의 테스트 이상으로, 이제 생업을 위한 준비에 무언가 시동을 걸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선은 운영자의 시동 준비 작업에서 경험한, Windows 7의 설치본을 Ghost 이미지로 백업하여 다른 시스템에서 복원하였을 때에 발생하였던 블루 스크린의 0x07B 오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Ghost 백업 이미지를 다른 컴퓨터에서 복원하여 부팅하면 아래와 같은 BSOD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류 메시지 내용입니다. A problem has been detected and windows has been shut down to prevent damage to your computer STOP: 0x0000007B (0x80D86B58,0xc0000034,0x00000000,0x0000000) Windows 7의 이미지 백업과 이의 배포나 복원 방법에는 다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운영자는 상기도 DOS용 Ghost 프로그램을 차마 아니면 결국에는 제일 간편한 방법으로 생각하기에 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용해왔었던 DOS용 Ghost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어느 시스템에 설치한 Windows 7의 설치본을 백업하여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아래 그림과 같은 다른 사양의 시스템에 복원하였습니다. 물론 이 오류는 시스템 준비 도구(SysPrep)에 의하여 작성한 시스템 준비 이미지로 다른 컴퓨터에 복원 시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8ipe1000_pro2란 Intel Chipset 메인보드의 경우로, 개략적인 시스템 사양은 장치 관리자 그림의 각 항목으로 짐작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다음은 AMD CPU를 장착한 M2N이란 메인보드 시스템입니다.
다음은 운영자의 가난한 P5B-E란 ASUS사의 Intel Chipset 메인보드 시스템입니다.
위의 각기 다른 시스템에서는 복원 작업 후, 시스템을 부팅하였을 때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제대로 부팅되어 운영체제 스스로가 각기 새 시스템에 맞는 드라이버를 자동으로 설치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크랙한 인증까지도 승계되어 제대로 작동하였습니다. 물론, 운영체제에 의하여 자동으로 장치가 설치된 후에는 스스로 자동 설치가 되지 않은 장치에 대한 구동 소프트웨어와 칩셋 소프트웨어를 사용자인 운영자가 의도적으로 새로 설치하여서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Windows XP 상에서 [ACPI(Advanced Configuration and Power Interface)]로 HAL 유형이 잡혔었던 시스템에서는 부팅 초기에 BSOD의 0x0000007B 오류가 발생하면서 Windows [바탕 화면]으로의 진입에 실패하였으며, 다시 재부팅하면서 아래 그림과 같은 [Windows 오류 복구]를 권유하는 화면이 표시되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해결책을 보고자 한다면 여기를 클릭하여 다음의 중간 과정은 생략할 수 있습니다.
2대의 각기 다른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같은 이 BSOD 오류에 대한 공통점은, 처음에는 이 문제가 Windows XP 기준으로 [ACPI(Advanced Configuration and Power Interface)] 컴퓨터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생각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비록 실패하여 도움이 되지는 못할 과정으로 해결책과는 무관한 사족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XP에서와 유사한 방법으로시도하였던 일련의 작업을 캡쳐한 그림들입니다. 그냥 그림으로만 나열합니다.
해결책과는 무관한, 위 그림을 나열하는 이유는 그간 XP의 Ghost 이미지를 사용하였었던 이들에게는 그래도 조금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앞으로 생길 것 같다라는 예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좌우지간에 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결론입니다. 여기에서 한참을 헤매다 힌트를 Google로부터 찾았습니다.
이미 여러 사용자들이 경험하여 알고 있겠지만, 힌트 제공을 결국에는 종합하는 MS의 문서입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Microsoft Windows Vista 기반 컴퓨터의 BIOS 설정에서 AHCI(Advanced Host Controller Interface) 사양을 사용하도록 부팅 드라이브의 SATA(Serial Advanced Technology Attachment) 모드를 변경한 다음 컴퓨터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오류 메시지가 나타납니다. STOP 0x0000007B INACCESSABLE_BOOT_DEVICE 이 문제는 Windows Vista에서 AHCI 드라이버(Msahci.sys)가 사용할 수 없게 설정되어 있으면 발생합니다. 부팅 드라이버의 SATA 모드를 변경하기 전에 이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게 설정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부팅 드라이브의 SATA 모드를 변경하기 전에 레지스트리에서 AHCI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게 설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실패한 하드 디스크를 원시 시스템에 장착하여 부팅합니다. 일차, 백업 이미지를 복원하여 부팅한 대상 컴퓨터에서의 부팅 실패로 위 그림 중의 [Windows 오류 보고] 화면이 나타나지만, [시동 복구 시작(권장]을 선택치 않고 바로 [표준 모드로 Windows 시작]을 선택하여도 부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모든 Windows 기반 프로그램을 종료합니다. 시작을 누르고 검색 시작 상자에 regedit를 입력한 다음 Enter 키를 누릅니다. 사용자 계정 컨트롤 대화 상자가 나타나면 계속을 누릅니다. 다음 레지스트리 하위 키를 찾아 누릅니다. HKEY_LOCAL_MACHINE\System\CurrentControlSet\Services
[Services] 키의 아래에 있는 폴더 섹션 중에서 잘알려진 메인보드 칩셋 이름과 IDE(Integrated Device Electronics)란 단어가 합쳐진 폴더를 찾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 정도입니다. ALIIDE / AMDIDE / INTELIDE / VIAIDE Ghost 백업 이미지를 옮기려고 하는 시스템의 칩셋과 일치하는 폴더 항목을 선택하여 오른쪽 창에서 이름 열의 Start 항목을 마우스 오른쪽 단추로 누른 다음 수정을 누릅니다. 값 데이터 상자에 0을 입력한 다음 확인을 누릅니다. 운영자가 복원하여 부팅에 실패한 2대의 [ACPI(Advanced Configuration and Power Interface)] 컴퓨터는 모두 VIA Chipset 메인보드였습니다. [VIAIDE]의 [Start] 이름의 [DWORD(32비트) 값] 편집에서 [값 데이터]를 "3"에서 "0"으로 설정 변경하였습니다.
파일 메뉴에서 끝내기를 눌러 레지스트리 편집기를 닫습니다. 이로써 문제가 해결되어, 레지스트리 수정한 HDD를 VIA Chipset 메인보드에 다시 장착하여 부팅하면 정상적인 부팅이 이루어집니다.
이 기사에서 다룬 예제 시스템 외의 원시와 대상 컴퓨터 간의 상관 관계의 파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VIA Chipset 시스템에서 작성한 백업을 ALI Chipset 시스템에 복원하였을 경우 등, 전체적인 칩셋 상호 간의 관계 파악을 말합니다. 예에서는 Intel에서 AMD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레지스트리 편집에서 보면 [Services] 항목 아래에는 많은 키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복원하려는 Chipset에 대응하는 IDE 항목만 편집하여 이 기사의 경우에는 문제가 해결은 되었지만, XP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Chipset 메인보드에서 Windows 7의 BSOD가 없는 부팅을 원할 경우, 모두들의 [값 데이터]를 수정하여도 문제가 없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리고 [값 데이터]가 "0"에서부터 "6"까지 설정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확실치는 않음) 아무리 검색 신공을 발휘하여도 그 각각의 값에 대한 정의를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숙제로 남습니다. | ||||
Sysprep 사용법(윈도우 XP)-윈도우 2000도 거의 비슷함
하나의 컴퓨터에서 만든 백업이미지로 시스템이 다른 컴퓨터에 복원을 하면 부팅이 안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특히 XP에서 오류가 나온다.
특히 이런 오류다.
복원한 후 파란 화면이 나오고 아래와 같은 에러가 나오면서 부팅이 안된다.
Error - STOP: 0x0000007B(0xFC937640, 0xC0000034, 0x00000000, 0x00000000)
이유는 고스트 2003 이 백업이미지를 만들 때 XP에 입력되어 있는 각 컴의 고유번호까지 복제되고 컴퓨터의 기계 정보 등 기타 정보들이 복제되기 때문에 다른 컴에서 복원될 때 그 고유번호 등 기타 정보가 달라 부팅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윈도우2000 이나 XP에 있는 sysprep 이라는 기능을 사용하여 백업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sysprep 은 사용자 와 컴퓨터의 고유정보 즉 사용자이름 , 컴퓨터 이름 등 그리고 고유번호(sid) 그리고 컴퓨터에 대한 기계 정보 또한 하드웨어 상의 기타 정보를 변경하거나 탑재하는 기능이다. 특히 고유번호(sid)를 제거하고 기타 정보들을 탑재시키는 기능이라서 어떤 하나의 컴퓨터에서고스트로 만든 백업이미지를 가지고, 백업이미지를 만들 당시의 컴퓨터가 아닌 다른 컴퓨터에 복원했을 때 고유번호가 다르고 기타 정보들이 달라 부팅이 안되는 것을 해결할 수가 있다.
그러면 Sysprep 사용법(윈도우 XP)에 대해 알아 보겠다.
그런데 이 Sysprep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윈도우 XP 시디와 노턴 고스트 2003 부팅 디스크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 그러나 Sysprep 사용하기 전 알아 두어야 할 것
(물론 여기서 제시한 방법은 필자가 10번에 걸쳐 실험하여 에러를 해결하여 만든 방법이어서 일단은 대부분의 컴퓨터에서 이상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Sysprep 사용 전 알아야 할 것은 이 Sysprep를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의 컴퓨터에서 만든 백업이미지를 가지고 사양이 다른 또 다른 컴퓨터에 복원을 시켰을 때 모든 컴퓨터에 전부 다 에러 없이 복원되어지지는 않는다라는 것이다.
즉 하드웨어가 너무 다르거나 특히 메인보드가 너무 사양이 낮아 다를 경우는 Sysprep을 사용해서 만든 백업이미지로 복원해도 역시 부팅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아예 하드웨어를 제거하거나 드라이브들을 다 없앤다음 백업이미지를 만들거나 복원해야 하는데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도 있고 쉬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 Sysprep 툴은 사양이 즉 시스템이 다른 컴퓨터에서 만든 백업이미지를 가지고 사양이 다른 컴퓨터에 복원시켰을 때 부팅이 되도록 하는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100%는 아니지만 다음 설명한 대로 한다면 거의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실제로 고스트2003으로 LG 컴퓨터(P4 2.66MHz, 512DDR 램, ..)에서 백업이미지를 만들어 삼성 컴퓨터(P4 1.4MHz, 256 SDRam, ...)에 복원을 해 보았는데 역시 부팅이 되지 않고 복원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삼성 컴퓨터에서 고스트 2003으로 백업이미지를 하드에 만들어 그 삼성 컴퓨터에 복원했을 때는 당연히 아무 이상없이 복원이 잘 이루어졌다.
실험했던 LG와 삼성 컴퓨터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메인보드였고 모든 사양이 다 달랐다. LG는 가장 최근 메인보드이고 삼성은 3년 전의 것으로 바이오스가 상당히 구 버전이었다.
그래서 이 Sysprep을 이용하여 10번 정도의 백업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에러를 없애는 방법을 찾아 Sysprep을 이용하여 LG 컴퓨터(P4 2.66MHz, 512DDR 램, ..)에서 백업이미지를 만들어 삼성 컴퓨터(P4 1.4MHz, 256 SDRam, ...)에 복원하는 것을 성공했다.
1. 먼저 윈도우 XP 시디안의 SUPPORT 폴더안의 TOOLS 폴더안에 있는 DEPLOY 압축파일을 복사해서 [내 문서]에(물론 C에다 해도 된다 ) 붙여 놓고 알집으로 압축을 푼다.
DEPLOY 압축파일을 복사해서 압축을 풀 때 이왕이면 [내 문서]에 하면 작업하기가 편리하다.
따라서 [내 문서]에 복사해서 압축을 풀기를 권유한다.



2. [내 문서]에 DEPLOY 압축파일을 복사해서 압축을 풀면 [DEPLOY]라는 폴더가 생기고 그 폴더안에
여러 파일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여기서 [DEPLOY]라는 폴더 안에 있는 파일들 중 setupmgr.exe 파일을 클릭하여 실행한다.

3. 그러면 다음과 같이 [윈도우 설치 관리자 마법사 시작]이 나온다.
[다음]을 누른다.

4. 그러면 [새 또는 기존 응답 파일]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여기서 [새 응답 파일 만들기(C)]에 체크를 하고 [다음]을 누른다.

5. 그러면 응답 파일의 용도를 선택하는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여기서 [Sysprep 설치(S)]에 체크하고 [다음]을 누른다.

6. 그러면 sysprep이 적용되어지는 운영체제를 선택하는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현재 설치되어 있는 운영체제를 선택하면 된다.
현재 컴퓨터에 윈도우 XP Professional 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Windows XP Professional(W)]에 체크를 하고 [다음]을 누른다.

7. 그러면 [사용권 계약]으로 사용자 입력 없이 윈도우를 설치할 수 있도록 자동화할 수 있는 여부를 선택하는 대화상자가 나온다.
여기서 자동화를 선택하면 미리 설정해 놓은 값을 그대로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을 의미하며
[아니오]를 선택하면 "컴퓨터 이름" 이나 "컴퓨터 사용자 이름" 등을 나중에 넣을 수 있어 복구할 때마다 컴퓨터 이름과 사용자 이름 등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아니오, 설치를 전체 자동화하지 않습니다(O)]를 선택하면 아래 [8]번에서 사용자 [이름]과 [조직]을 쓰지 않아도 진행하게 된다.
8. 그러면 소프트웨어 사용자를 지정하는 대화상자가 나온다. 사용자 이름과 조직을 써 넣는다.
만약 위의 [사용권 계약] 단계에서 [아니오, 설치를 전체 자동화하지 않습니다(O).]를 선택했을 경우 이 [소프트웨어 사용자 지정]을 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지만
위의 [사용권 계약] 단계에서 [예, 설치를 전체 자동화합니다(Y).]를 선택했을 때는
이 [소프트웨어 사용자 지정]을 반드시 해 주어야 한다. [다음]을 누른다.

9. 그러면 [디스플레이 설정]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Windows 기본값 사용]이 나오는데 이 기본값 사용으로 설정하고 [다음]을 누른다.

10. 그러면 [표준 시간대] 설정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화면에 나온 것 처럼 설정하고 [다음]을 누른다.

11. 그러면 제품 키 번호를 입력하는 대화상자가 나온다. 윈도우 XP 제품 키 번호를 입력하고 [다음]을 누른다. (XP에서는 제품 키 번호를 반드시 입력해야 한다. 만약 위의 [7]번의 [사용권 계약] 단계에서 [아니오, 설치를 전체 자동화하지 않습니다(O).]를 선택했을 경우에는 윈도우 XP 제품 키 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12. 그러면 다음은 네트워크 상에서 구별되는 컴퓨터 이름을 설정하는 대화상자가 나온다.
여기에서는 [컴퓨터 이름 자동 생성(U)]에 체크를 한다.(권유)
[대상 컴퓨터 이름 지정(S)]을 체크할 경우에는 원하는 이름을 적어 넣으면 된다.

13. 그러면 [Administrator 암호]를 지정하는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여기서 암호를 지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암호를 지정하지 않고 [다음]을 누른다.

14. 그러면 [네트워크 구성 요서] 설정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반 설정(T)]에 체크를 하고 [다음]을 누른다.

15. 그러면 [작업 그룹 또는 도메인] 이라는 네트워크 참가 방법을 선택하는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작업 그룹(W)]에 체크하고 [다음]을 누른다.

16. 그러면 [전화 통신]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설정을 하지 않고 [다음]을 누른다.

17. 그러면 [국가별 설정]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설치하는 Windows 버전의 기본 국가별 설정 사용(U)]에 체크하고 [다음]을 누른다.

18. 그러면 다른 [언어] 추가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추가할 언어가 있으면 선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다음]을 누른다.

19. 그러면 [프린터 설치]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이 단계는 네트워크 프린터가 대상 컴퓨터에 자동으로 설치되도록 설정하는 것으로 네트워크 프린터 이름을 써 주고 [추가(A)]를 누르면 된다.
여기서는 네트워크 프린터를 설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다음]을 누른다.

20. 그러면 [한 번 실행]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사용자가 처음으로 로그온할 때 명령이 자동으로 실행하도록 설정하는 단계이다. 여기서는 설정하지 않겠다. [다음]을 누른다.

21. 그러면 사용자의 로그온이 필요 없는 명령을 실행할 수 있도록 [추가 명령]을 설정할 수 있는 대화상자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추가 명령을 설정하지 않겠다. [다음]을 누른다.

22. 그러면 나중에 컴퓨터에 어떤 Sysprep 이미지가 설치되었는지 알 수 있도록 Sysprep 정보를 입력하는 [OEM 중복기 문자열] 대화상자가 나온다. 이것은 중복된 컴퓨터의 레지스트리에 문자열을 추가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어떤 것도 입력하지 않고 [마침]을 누른다.

23. 그러면 지금까지 설정해서 만든 Sysprep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응답파일이 만들어지는 위치를 설정하는 [위치 및 파일 이름(L)] 대화상자가 나온다.
대화상자에 나타난 대로 DEPLOY 폴더에 응답파일을 만들 것이니 바로 [확인]을 누른다.

24. 그러면 설치 관리자 마법사를 완료했다는 [설치 관리자 완료] 대화상자가 나온다. 그러면 상단 오른쪽에 있는 × 표를 눌러 닫으면 된다.

25. 그러면 C:\Documents and Settings\111\My Documents\DEPLOY 폴더(즉 [내 문서] 안에 있는 DEPLOY 폴더)에 Sysprep 응답파일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111] 은 컴퓨터에 따라 다른다. 컴퓨터 사용자 이름이 "김의기" 로 되어 있다면
[111]은 [김의기]로 나온다. 즉,
C:\Documents and Settings\김의기\My Documents\DEPLOY 로 된다.


26. 그리고 또한 C에 즉 C의 루트 디렉토리에 Sysprep 폴더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그 Sysprep 폴더안에는 [i386]이라는 폴더와
C:\Documents and Settings\111\My Documents\DEPLOY 폴더(즉 [내 문서])에 만들어진 것과
똑같은 "Sysprep 응답파일"이 만들어진다.


27. 이 [내 문서]에 만들어지고 또 C의 Sysprep 폴더 안에 똑같이 만들어진 Sysprep 응답파일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8. 그러면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여기서 다시 [내 문서]에 있는 [DEPLOY] 폴더로 가서 "Sysprep 응답파일"을 연다.

29. [내 문서]의 [DEPLOY] 폴더 안에 있는 "Sysprep 응답파일"을 열고
2번째 줄에 즉 ";SetupMgrTag" 다음 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써 넣는다.
[Sysprep]
BuildMassStorageSection=yes
[SysprepMassStorage]
30. 이렇게 써 넣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SysprepMassStorage] 밑에 한 줄을 띄어야 한다.

31. 이렇게 써 넣은 다음 [파일]을 눌러 [저장]을 한다.

32.(아주 중요)
이렇게 저장을 한 후 C로 가서
C에 만들어져 있던 [Sysprep] 폴더를 복사하여
C에 있는[Documents and Settings] 폴더 안에 있는 [111] 폴더에다 붙여 넣는다.
물론 여기서 [111] 은 컴퓨터에 따라 다른다. 컴퓨터 사용자 이름이 "김의기" 로 되어 있다면
[111]은 [김의기]로 나온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C에 있는[Documents and Settings] 폴더 안에 있는 [김의기] 폴더에다 붙여 넣어야 한다.



33. C에 만들어져 있던 [Sysprep] 폴더를 복사하여
C에 있는[Documents and Settings] 폴더 안에 있는 [111] 폴더에다 붙여 넣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34. 그러면 다시 [내 문서]에 있던 [DEPLOY] 폴더 안에서
Setupcl.exe 파일과 Sysprep.exe 파일 그리고 [29] 번에서
";SetupMgrTag" 다음 줄에
[Sysprep]
BuildMassStorageSection=yes
[SysprepMassStorage]
라는 내용을 첨가하여 만든 "Sysprep 응답파일" 인 Sysprep.inf 파일을 복사하여

앞 [32]번에서 했었던, 즉 C에 만들어져 있었던 [Sysprep] 폴더를 복사하여 C에 있는[Documents and Settings] 폴더 안에 있는 [111] 폴더에다 붙여 넣었던 [111] 폴더안에 있는 [Sysprep]폴더 안에 붙여 넣는다.

35. 그러면 이미 "Sysprep 응답파일" 인 Sysprep.inf 파일이 있다고 파일 바꾸기를 하겠냐고 묻는 대화 상자가 나온다. 그러면 [모두 예(A)]를 누른다.

36. 그러면 [내 문서]안의 [DEPLOY] 폴더 안에 있던 Setupcl.exe 파일과 Sysprep.exe 파일 그리고 Sysprep.inf 파일이 [111] 폴더안에 있는 [Sysprep]폴더 안에 붙여 넣어진 결과는 다음과 같다.

37. 그러면 [내 문서]안의 [DEPLOY] 폴더 안에 있던 Sysprep.inf 파일이 제대로 복사되었는지 내용을 확인해 보면 제대로 복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8. (중요)
그러면 컴퓨터의 [시작] -> [프로그램] -> [보조프로그램] -> [명령 프롬프트]를 클릭한다.

39. [명령 프롬프트]를 클릭하면 다음과 같이 도스 모드가 나온다.
아마 왜 C에 있던 [Sysprep] 폴더를 [Documents and Settings] 폴더 안에 있는 [111] 폴더에 복사하여 넣어야 하는 가를 아래 도스 모드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명령 프롬프트]를 클릭하면 항상 [Documents and Settings] 폴더 안에 있는 [111] 폴더로 만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40. 그러면 "\111>" 바로 다음에다 "cd sysprep" 라고 쓰고 엔터를 친다.

41. 그러면 [111] 폴더 안에 있는 [sysprep] 폴더로 들어가게 된다.

42. (중요)
그러면 "\sysprep>" 뒤에 "sysprep -bmsd" 라고 쓰고 엔터를 친다.
여기서 바로 " -bmsd" 라는 명령어가 시스템이 다른 컴퓨터에 복원을 했을 때 나타나는 파란 화면의 " STOP: 0x0000007B " 라는 에러를 해결해 주는 명령어이다.

43. 그러면 "-bmsd" 라는 명령에 따라
SysprepMassStorage 내용을 작성하는 [Sysprep에서 작업 중...]이라는 대화 상자가 나온다.
약 1-2 분정도 진행한다.

44. Sysprep에서 작업이 다 되면 다음과 같이 다시 [명령 프롬프트] 가 나오는데
상단 우측의 닫기 (×)를 눌러 [명령 프롬프트] 창을 닫는다.

45. 그러면 SysprepMassStorage 내용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알아 보자.
[Documents and Settings] 의 [111] 폴더 안의 [sysprep] 폴더 안에 있는 "Sysprep 응답파일" 인 "sysprep.inf" 파일을 열어 보자.

46. "Sysprep 응답파일" 인 "sysprep.inf" 파일을 클릭해 보면
[SysprepMassStorage] 아래로 컴퓨터 기계와 하드웨어 대한 정보를 닮고 있는 정보 파일들이 만들어 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많은 내용이 아래로 계속있다.

47. (제일 중요)
이제 이 [Documents and Settings] 의 [111] 폴더 안에 있는, 즉 [SysprepMassStorage] 섹션에 많은 정보파일이 만들어 진 " Sysprep 응답파일"이 들어 있는 [sysprep] 폴더를 복사하여 C에 붙여 넣는다.

C에 붙여 넣는다.

이미 C에는 [sysprep]라는 폴더가 있기에 [폴더 바꾸기 확인]이 나오는데 [모두 예(A)]를 누른다.

48. 그러면 최종적으로 C에 [SysprepMassStorage] 섹션에 많은 정보파일이 만들어 진 sysprep 응답파일인 sysprep.inf 파일과 sysprep.exe 파일 그리고 setupcl.exe 파일 3개가 들어가 있는 [sysprep] 폴더가 만들어지게 된다.(처음에 [내 문서]에서 [DEPLOY]에서 setupmgr.exe 파일을 클릭하여 진행한 후 만들어 졌던 [sysprep] 폴더가 수정된 내용으로 바뀐 것이다.)

제대로 복사가 되었는지는 확인해 보려면 [SysprepMassStorage] 섹션에 많은 정보파일이 만들어 진 sysprep 응답파일인 sysprep.inf 파일을 열어 보면 알 수 있다.

49. 그러면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
이 모든 작업을 다 마치면 이제 C에 수정되어 만들어 진 [sysprep] 폴더 안에 있는 sysprep.exe를 클릭하여 실행한다.
즉 아래 화면에 있는 sysprep를 클릭한다. 이 파일은 C의 [sysprep] 폴더 안에 있다.

50. 그러면 다음과 같이 위에서 변경하여 설정한 정보대로 일부 매개 변수를 수정하여 복제한다는 [Windows 시스템 준비 도구] 대화상자가 나온다.
여기에서 새롭게 설정한 것으로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확인]을 누른다.

51. 그러면 아래와 같은 대화창이 나온다.
여기에서 아래 [플래그]부분을 그대로 두고 [다시 봉인(R)]을 클릭한다.
즉 아래 [플래그]에서 [NoSIDGen(N)]에 체크를 하지 말고 [Shutdown] 그대로 놓고
[다시 봉인(R)]을 클릭한다.


물론 위 [시스템 준비 도구] 가 내용은 같은 것이지만 XP버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오기도 한다.
여기서 [옵션]이 위에서는 [플래그]이고 [보안 식별자를 다시 생성하지 않음(O)]은
[NoSIDGen(N)] 이다.

여기서 잠깐 위 [시스템 준비 도구]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다시 봉인(R)]- 이벤트 보기 로그를 제거하고 고객에게 인도하기 위해 컴퓨터를 준비한다. 다음 부팅 시 Windows 시작이나 최소 설치가 시작하도록 설정된다. [공장(F)] 명령을 실행한 경우 [공장(F)] 명령을 실행하거나, Sysprep 대화 상자에서 재봉인 즉 [다시 봉인(R)]단추를 눌러 사건 설치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대로 설치를 봉인해야 한다.
* [공장(F)] - Windows 시작이나 최소 설치를 표시하지 않고 네트워크 가능 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 이 매개 변수는 드라이버를 업데이트하거나, 플러그 앤 플레이 열거를 실행하거나, 프로그램을 설치하거나, 테스트하거나, 컴퓨터를 고객 데이터로 구성하거나, 공장 환경에서 다른 구성을 변경하는 데 유용하다. 디스크 이미징(또는 복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회사의 경우 Factory 모드는 필요한 이미지 숫자를 줄일 수 있다.
Factory 모드에서 원하는 작업 세트를 마쳤으면 Sysprep.exe와 함께 [다시 봉인(R)] 매개 변수를 사용하여 최종 사용자에게 인도하기 위해 컴퓨터를 준비한다.
* [NoSIDGen(N)] 또는 [보안 식별자를 다시 생성하지 않음(O)] - 새 SID를 만들지 않고 Sysprep.exe를 실행한다. Sysprep.exe를 실행 중인 컴퓨터를 복제하지 않거나 도메인 컨트롤러를 미리 설치할 경우에는 이 매개 변수를 사용해야 한다.
* [사전 활성화(E)] 또는 [인증 기간을 다시 설정하지 않음(N)] - Windows 제품 정품 인증 유예 기간을 다시 설정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Windows 설치에 대한 정품 인증한 경우에만 이 매개 변수를 사용한다.
중요: Windows 설치에 대한 정품 인증하는 데 사용한 제품 키가 특정 컴퓨터에 부착된 COA 스티커의 제품 키와 일치해야 한다.
* [Shutdown] 또는 [시스템 종료] - Sysprep.exe가 완료된 후 컴퓨터를 종료한다.
52. 그러면 보안 ID(SID) 즉 [보안 식별자]를 다시 생성한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그러면 여기서 [확인]을 누른다.

53. 그러면 [Sysprep]가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Sysprep에서 작업 중...]이라는 대화 상자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는 약 10 분정도 진행한다. 설정한 정보 특히 컴퓨터 기계와 하드웨어 정보를 처리하느라 약 10분정도 소요되니 기다려야 한다. 컴퓨터에 따라 시간이 더 소요될 수도 있다. 컴퓨터가 다운된 것으로 착각하고 컴퓨터를 끄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 수고가 되니 다 진행될 때 까지 꼭 기다려야한다.
다 진행이 되면 컴퓨터가 종료가 된다.

54. (가장 중요)
그러면 컴퓨터가 종료되었기 때문에 컴퓨터를 다시 켜면(그런데 여기서는 컴을 다시 켜면 안된다. 고스트 2003으로 백업이미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윈도우 XP에서 보았던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팅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설치되는 화면이 나온다. 이 설치 화면을 Mini Setup Wizard라고 부른다. 원래의 셋업 마법사 중에서 일부만 변경하는 일종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Mini Setup Wizard는 사용자 및 조직 이름, 컴퓨터 이름, 지역 설정, 시간대 설정, 네트워크 설정, 네트워크 프린터 설정 등의 일부 사용자 설정에 관해 물어보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응답 과정은 위에서 만들었던 sysprep.inf 라는 응답 화일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구성하여 만들었을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전에 언급한 것처럼 바로 위에서 " 매개 변수가 수정되는 프로그램이 실행된 후 즉 [Sysprep에서 작업 중... ]이 다 진행된 후 컴퓨터가 자동으로 종료된 후 " 컴퓨터를 다시 켜지 말고 고스트 2003 부팅 디스크를 넣고 고스트 2003 부팅 디스크로 부팅을 해야한다. 만약 고스트 2003 부팅 디스크로 부팅을 하지 않고 컴퓨터를 켜면 위에서 만든 sysprep 응답 파일로 바로 컴퓨터가 복구가 되기 때문에 고스트 2003 으로 백업이미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 매개 변수가 수정되는 프로그램이 실행된 후 즉 [Sysprep에서 작업 중... ]이 다 진행된 후 컴퓨터가 자동으로 종료된 후 " 컴퓨터를 다시 켜지 말고 고스트 2003 부팅 디스크를 넣고 고스트 2003 부팅 디스크로 부팅을 해야한다.
그래서 고스트 2003 부팅 디스크로 부팅을 하여 고스트 실행화면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고스트 2003 으로 백업이미지를 만든다.
바로 이렇게 만든 이 백업이미지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Sysprep을 사용하여 만든, 시스템이 다른 컴퓨터에도 사용할 수 있는 고스트 백업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만들어진 백업이미지로, 시스템이 다른 컴퓨터에 고스트 2003 으로 복원을 시켰을 때 위에서 언급한 Mini Setup Wizard 로 부팅이 되어져 몇 가지 설정이 바뀌게 되어 다른 컴퓨터에서도 고스트로 복원된 후 부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Sysprep를 사용하여 만든 백업이미지로 복원을 시키면 Sysprep를 작성할 때 설정하는 것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 부팅된 후
Microsoft Windows 시작이라는 Mini Setup Wizard 가 나온다.
즉 "처음 사용자 사용권 계약" -> "제품 키" -> "컴퓨터의 이름 지정" -> "인터넷 연결 확인"
-> ("Administrator 암호 설정") -> ("컴퓨터의 도메인 여부") -> "고속 연결 설정"
-> "Microsoft에 등록 여부" -> "사용자 이름 입력" -> "감사합니다"
의 순으로 설정하게 된다. 이 설정이 다 이루어지면 XP를 사용하게 된다.
즉 위에서 설명한 대로 sysprep을 작성하여 백업이미지를 만들면 컴퓨터의 고유 번호를 다시 생성하고 컴퓨터의 기계와 하드웨어 정보를 다시 작성하기 때문에 어떤 한 컴퓨터에서 고스트 2003 으로 만들어 놓은 백업이미지를 사용하여 백업이미지를 만들 당시의 그 컴퓨터가 아닌 시스템이 다른 컴퓨터에 복원을 시켰을 때 부팅이 안 되는 에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55. 나중에 이렇게 만든 백업이미지로 시스템이 다른 컴퓨터에 복원을 하면 C에 있던 [sysprep] 폴더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 [Sysprep에서 작업 중...] 이 끝났을 때의 결과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그 결과를 보여주면 다음과 같다. 물론 [Sysprep]폴더 안에 있는 파일들이다. 여기서 "cleandrm.log" 파일이 새로 생성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마지막 [Sysprep에서 작업 중...] 이 끝났을 때 생성되는 "cleandrm.log" 파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6. 그러나 하드웨어가 너무 다르거나 특히 메인보드가 너무 사양이 낮아 다를 경우는 Sysprep을 사용해서 만든 백업이미지로 복원해도 역시 부팅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아예 하드웨어를 제거하거나 드라이브들을 다 없앤다음 백업이미지를 만들거나 복원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고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필자가 설명한 방법은 에러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내어 sysprep을 이용하여 백업이미지를 만드는 방법이고 또 실제로 실험을 거친 방법이기에 하나의 컴퓨터에서 만든 백업이미지로 시스템과 사양이 다른 컴퓨터에 복원을 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여겨진다
[출처] [펌] XP를 고스트로 구워서 다른 PC에 사용하자.|작성자 유틸초보
noun 1. the act of testing. 2. the testing or trial of a person's conduct, character, qualifications, or the like. 3. the state or period of such testing

솔직한 성격, 직설적인 화법 때문에 ‘오바마의 고통스러운 반쪽’ ‘불만에 찬 흑인여성’이라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그러나 신념에 찬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가질 뿐 아니라, 남편 버락 오바마마저 더 진실돼 보이게 만들었다. 버락 오바마의 부인이 아닌, 성공한 흑인여성으로 들여다볼 때 그녀의 삶은 훨씬 가치 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보다 영부인 미셸의 인기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똑같은 ‘가식 없는 모습’이 그녀의 매력으로 꼽힌다.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는 물론 그냥 생긴 게 아니다. ‘뉴스위크’는 자신의 능력과 인종, 계급, 그리고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 갈등을 극복하며 얻어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의 복잡함과 혼란을 오로지 실력과 진지함으로 이겨낸 미셸 오바마는 미국 현대여성의 또 다른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미셸 라본 로빈슨은 1964년 1월17일 시카고 남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청 정수공장 보일러 룸에서 교대로 근무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미셸 위로 16개월 먼저 태어난 오빠가 있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했다. 서른 살에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이후 건강이 계속 나빠졌다. 그런데도 열심히 일을 해 자녀 둘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둘 다 프린스턴대에 보냈으니 자식농사를 잘 지은 셈이다. 어머니는 딸 미셸이 웬만큼 자라자 은행에 취직해 최근까지 다니다 손녀를 돌보기 위해 그만뒀다.
미셸이 태어난 곳은 흑인이 주로 거주하는 서민동네였다. 가족 넷이 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힘겨운 삶이었다. 부모가 단 하나뿐인 침실을 쓰고 거실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아들 방, 딸 방,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공부방으로 만들었다. 교육열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부모는 남매에게 매일 밤 텔레비전을 1시간만 보게 하는 대신 독서, 체스, 스포츠 등 몸과 마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활동을 권했다.
미셸의 어머니는 딸이 집중력이 매우 강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치더라도 그만 치라고 할 때까지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성격이 약간 불같은 데가 있고 지는 걸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운동선수로서도 재능이 있었는데 오빠인 크레이그에 따르면 지는 것을 싫어해 경쟁적인 스포츠는 아예 하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현재 오리건 주립대학 농구팀 감독이다.
미셸은 어릴 때부터 똑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줄곧 영재반에 들어갔으며 중학교 졸업식 때는 졸업생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생의 95% 이상이 아이비리그에 들어가는 명문 공립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열심히 일하는 부모의 뒷받침을 받으며 미셸은 2학년을 월반했다. 그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녀는 오빠의 뒤를 이어 프린스턴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택한다.
가난하지만 훌륭한 부모
미셸의 1차적 스승은 부모였다. 양친은 그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지속적으로 불어넣어준 멘토였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늘‘무엇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무엇이 잘못될지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주문처럼 늘 내 머리에 새겨져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었다.”
미셸은 대통령선거 기간 중인 2008년 1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연설에서 “내 인생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시청 공무원의 박봉으로 4인 가족을 부양했다는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삶을 보여주었다. 한때 수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서른이 넘어서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없는 지경에도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매일 직장으로 출근했다. 그러나 미셸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신장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아버지는 그녀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마음이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 미셸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커리어를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마다 과연 아버지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남에게 베풀며 사는 법을 가르쳐준 것도 부모였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며 일을 하면서도 정치 자원봉사를 했고 어머니도 틈만 나면 학교 자원봉사를 했다. 이런 성장 배경은 그녀가 나중에 시카고의 일류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사회봉사직으로 옮겨 사적인 삶보다 공적인 삶에 관심이 많던 버락 오바마를 남편으로 선택하는 바탕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버락 오바마는 1980년대 후반, 결혼 전 미셸 집을 방문했을 때 “영화 세트장에 와 있는 것처럼 완벽한 가정이었다”고 말했다. 일과 양육에 헌신하는 쾌활한 아버지, 과자를 굽고 아이들 학교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어머니, 친구 같은 오빠. 친척들도 와서 몇 시간씩 농담을 하고 식사하며 음악을 듣는 모습은 단란한 가족의 전형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낯선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란 버락으로서는 충분히 충격받을 만한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가정에도 그늘이 있었다. 아버지의 병은 곧 어머니에게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것저것 꼼꼼하게 조정하는 데 들인 노력이 만만치 않았다. 미셸은 선거기간 중 여러 인터뷰를 통해 굉장한 현실감각을 드러내보였는데, 아마도 평온한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을 어릴 적 부모를 통해 봐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 딸 말리아, 샤샤와 함께한 오바마 부부.
프린스턴의 이방인
미셸은 1981년 가을 프린스턴대에 입학하면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알았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는다. 프린스턴은 겨우 몇십년 전에야 남녀공학이 됐고, 흑인을 입학시킨 것은 채 20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그녀는 우리로 치면 81학번인데 당시 총 1141명의 프린스턴 신입생 가운데 94명이었던 흑인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사실 미셸이 태어난 시카고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도시다. 외할아버지는 목수였는데 피부색 때문에 목수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건축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셸이 성장하던 시절에는 세상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인권운동으로 1964년에는 민권법이, 1965년에는 투표권법이 제정됐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맬컴 엑스 같은 걸출한 흑인지도자가 등장했다. 미셸이 살던 도시 태생인 제시 잭슨 목사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최초의 흑인이 될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미셸 부모는 아이들에게 열심히 노력하고 꿈은 원대하게 품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대학은 달랐다. 미셸은 프린스턴대 학보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몇 안 되는 흑인 학생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생각했던 것만큼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부유하고 근심 걱정 없는 학생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낯설었다. BMW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BMW를 타는 학부모조차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텔레그래프’ 인터뷰)
일부 백인 교수와 친구들이 아무리 진보적이고 편견 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해도 때때로 방문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문화적 충격은 자칫 부자에 대한 질시와 미움, 혹은 그들의 삶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으로 작용하기 쉬운데 미셸은 ‘봉사활동’을 택한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수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지역 아동들을 돕는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센터 일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로 치면 공부방 자원봉사나 야학 같은 일이다. 또 ‘프린스턴’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다종다양한 지역 흑인 학생들을 위한 지도와 상담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흑인연합조직에서도 활동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미셸은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계획을 세우고 지켰으며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 전부터 공부했다. 그녀의 존재감은 대단했다고 한다. 하버드 로스쿨 지도교수였던 데이비드 윌킨스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어떤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논리적 기교를 부리기도 하는데 미셸은 언제나 입장을 뚜렷하게 표명했다”고 회고한다.
흑인 엘리트의 진로
‘공부’라는 현실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고민을 놓지 않았던 미셸의 선택은 대학졸업논문에 그대로 반영된다. 사회학을 전공한 그녀는 1985년 졸업논문 제목으로 ‘프린스턴에서 교육받은 흑인과 흑인사회’를 택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학에서 나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또렷이 인식하게 되었다”는 게 집필 동기였다. (버락 오바마 선거운동본부는 처음엔 대통령선거 때까지 미셸의 이 논문 공개금지를 요청했지만 투명성을 지키겠다는 애초의 방침을 의식하면서 2008년 2월에 공개했다.)
미셸은 논문작성을 위해 흑인 졸업생 4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들 중 다수가 흑인에게 경제적 교육적 직업적 기회를 제공한 소수계 우대정책이 시행되던 1970년대에 프린스턴대를 다녔다. 그녀는 설문조사 결과 학생들이 졸업 후 교육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향상되면서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모두들 대학시절 초기에는 흑인사회의 일원으로 내가 받은 혜택을 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되돌려줄 의무가 있고 현재와 미래의 능력을 이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써야 한다는 생각에 전혀 의심이 없지만, 졸업이 가까워지면 하나같이 명문대학원 혹은 전문대학원 입학이나 성공적인 기업에 고액 연봉자로 취업하는 것 등 백인 학생들과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미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졸업 후 혼돈은 가시지 않았지만 어떻든 그녀가 하버드 로스쿨을 선택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하버드에서도 프린스턴에서와 같은 인종적 차이를 느꼈다. 공강 시간에 법률학술지를 만드는 등 로스쿨의 전통적인 활동을 하기보다 자신이 태어난 흑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열심이었다. 유색인종 학생들의 입학을 돕는 활동을 했고 하버드에 더 많은 소수계 학생과 교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성적이 우수해 1988년 졸업할 무렵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성공적인 기업의 고액 연봉’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녀는 당시 최고 직장으로 꼽히는 로펌 ‘시들리 앤 오스틴’에 입사한다. 마케팅과 지적재산권 업무를 담당했는데 연예·오락산업 관련법을 전문적으로 다뤘다. 고액 연봉을 받는 덕분에 학자금 대출도 갚을 수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있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꿈은 미뤄놓았다. 이대로 가면 백인 주류사회로의 진입과 성공이 보장되는 듯했다.
이곳에서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남자를 만나는데, 바로 버락 오바마다. 버락은 미셸이 입사 1년 만에 인턴하계사원으로 맞은 후배였다. 1989년 당시 버락은 미셸의 고향인 시카고 남부지역에서 3년간 지역사회운동을 한 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해 1학년을 마친 상태였다.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마음속으로 법대 입학이라는 선택을 함으로써 젊은 시절의 이상을 저버린 것은 아닌지, 돈과 권력이라는 냉엄한 현실에 굴복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하던 시절이었다.
“얘기 나누기 좋은 남자”
미셸은 회사 측으로부터 인턴사원에게 근무 요령을 가르쳐주는 멘토가 되라는 지시를 받는다. 동료들은 버락이 잘생기고 자기소개서 성적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미셸은 별 관심이 없었다. 세 살 연상인 버락에 대한 미셸의 첫인상은 이랬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않으면서 굉장히 똑똑하고 흥미로운 배경을 지닌 ‘이야기하기에 즐거운 남자’였다.”
버락 역시 키가 크고 한눈에 커리어 우먼으로 보이는 단정한 정장을 입은 그녀가 매력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대번에 미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미셸은 자신의 삶에 남자가 들어올 틈이 없다고 말했다. 버락은 자신의 책에서 그러한 미셸에게서 오히려 “세상이 얼마나 덧없는지 마음속 깊이 잘 알기 때문에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모든 계획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다는 걸 안다는 듯한 희미한 기운”을 느꼈다고 꽤 문학적으로 표현했다. 강한 겉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그늘을 읽은 것일까?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숨겨진 면을 알고 싶었다.
버락의 첫 번째 데이트 신청은 멘토와 멘티 관계에서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락은 자신이 지역사회운동가로 일하던 시카고 남부 교회로 미셸을 초대했다. 1989년 여름이었다. 초대받은 교회가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곳에서 가까운 데다 정식 데이트도 아니었기에 미셸은 초대에 응했다.
교회 지하에 도착하자 대다수가 흑인 싱글 맘인 군중이 버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하는 세상’을 꿈꾸자며, 보통사람들이 그 간격을 좁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열성적으로 말했다. 청중에게 연설하는 버락의 모습은 평소 정장을 입고 사무소에서 일하는 인턴사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흑인으로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자신보다 더한 도전과 어려움을 겪었을 그는 정장차림으로 법률사무소 직원들과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미셸은 ‘버락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두 세계에 모두 편안하게 어울리는 남자. 그 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가난한 흑인이 대부분인 청중을 향해 세상이 공평하지 않고 환경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믿음을 잃지 말라고 연설하는 그에게 반한 것이다. 당시 미셸은 이십대 중반으로 프린스턴대 졸업논문에서 쓴 것처럼 ‘백인 급우들과 많은 부분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보수적 가치’를 추구하며 ‘시들리 앤 오스틴’에서 놀라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버락을 만난 그해 여름 미셸은 자신이 이제 더는 그 세계 일원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셸이 버락에게 마음을 연 것은 그 무렵이었다. 여름이 끝나자 버락은 하버드대로 돌아가고 미셸은 시들리 법률사무소에 남았다. 한 사람은 공부하고 한 사람은 일을 하면서 장거리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 무렵 미셸에게 존재를 뒤흔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수술 후 뜻하지 않게 세상을 뜨고, 친한 친구마저 스물다섯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은 미셸은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영원한 것 없는 세상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과연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걸까,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나도 당장 내일 죽을 수 있는데 이게 정말 내가 시간을 바치고 싶은 일인가?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서 있는 것처럼 어떤 열정이나 기쁨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당시 버락은 ‘하버드 로 리뷰(The Harvard Law Review)’ 최초의 흑인 편집장이 되면서 책을 써서 명성을 쌓아나갔고 미셸은 회의를 품으면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1991년 버락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시카고로 돌아왔지만 시들리 같은 대형 로펌 대신에 작은 공익회사를 택한다. 버락을 보면서 미셸의 고민은 정점에 달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사뭇 다른 환경에서 자랐으나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 오바마 부부.
로펌을 그만두고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그 뒤에 닥칠 ‘배고픔’을 생각하니 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때 용기를 북돋워준 이가 바로 버락이다. 결혼해서 아끼고 산다면 수입이 적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희망적으로 얘기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92년 10월3일에 결혼하고, 미셸은 그 이듬해 청소년을 위한 멘토 프로그램인 ‘시카고 공공연대’ 사무처장을 맡았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협력기금을 모은다.
1996년 시카고대학병원으로 옮기는데, 그 병원이 공공연대와 같은 이상을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셸은 학생처 부처장과 대학사회봉사센터의 장으로서 학생 자원봉사활동을 지휘하면서 소외계층에 동기부여를 하는 다른 젊은 학생들을 지원했다. 그 와중에 1998년 첫딸을 낳았고 2001년 둘째딸을 낳는다. 남편 버락은 정계에 입문했다. 버락이 상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에 입성하게 됐으나, 미셸은 직장이 있고 어린 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시카고에 남기로 한다. 2005년엔 시카고대학병원 대외협력 담당 부원장으로 승진했다.
힐러리가 ‘유리천장’을 깨려고 노력했다면 미셸은 ‘생활인으로서의 영부인’모습을 보여준다.
“복권 당첨을 바라시지! ”
일하는 현대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영원한 숙제다. 아무리 사회보육시설이 잘돼 있어도 결국은 엄마가 육아 부담을 져야 하는 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바마 부부에게도 마찬가지다. 버락은 저서‘담대한 희망’에서 일과 가족 사이의 균형을 잡는 문제에 대해 아내와 자주 언쟁을 벌였다고 고백했다. 미셸이 종종 버락을 향해 자기 삶에만 몰두한다고 비난하고, 애들을 혼자 힘으로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2004년 ‘시카고트리뷴’과의 인터뷰 기사에 실린 미셸의 토로는 모든 일하는 여성에게 주어진 운명을 표현한 말이다. “제가 남자들, 모든 남자에게서 발견한 건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서는 나, 그 다음이 가족, 신(神)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는 거죠. 남자들에겐 ‘나’가 제일 중요해요. 반면 여자들에게 ‘나’는 네 번째예요. 이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죠.” 이 시절 부부는 둘 다 공공부문에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버락이 펴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인세로 버티던 시절,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한다는 남편 이야기를 듣고 미셸은 화를 냈다고 한다. 두 사람 관계가 가장 안 좋은 시절이었다. 버락이 연방 상원의원 출마계획을 내놓을 때도 미셸은 “말도 안 된다”고 반대했다. 재정적인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또 책을 쓰면 된다”는 남편의 말에 미셸은 속으로 ‘콩나무를 타고 올라가 황금 알을 가지고 내려오시든지’ 하고 조롱했다고 한다. 하지만 버락이 실제로 책을 쓰고 상원의원이 됐으니 미셸에게 황금 알을 가져다준 셈이다. 베스트셀러 ‘담대한 희망’은 수십억원의 인세를 안겨주어 집을 사는 데도 보탬이 됐다.
선거운동 기간 중 각종 인터뷰에서 미셸은 내놓고 남편 흉을 보아 “남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좋은 남자지만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놓고 바지도 문 앞에 아무렇게나 벗어놓는다. 신문도 본 그대로 펼쳐놓는다.” “잘 때 코를 골고 발 냄새를 풍겨 딸들이 아빠 침대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빵에 버터를 제대로 바를 줄 모르고 (버터를) 냉장고에 넣지 않아 녹아버릴 때도 있다.”
사실 두 사람의 성장환경은 판이했다. ‘베니티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미셸은 가족에 대해 전통적인 개념을 갖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는 집에 있고 아빠는 일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게 가족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하지만 버락은 아버지 없이 자랐고, 어머니는 세계를 여행하고 다녔다. 미셸은 “우리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부부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뭇 다른 생각을 품고 결혼한 셈”이라고 털어놓았다.
“두려움을 떨쳐버려라”
미셸은 버락이 상원의원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나는 가족을 위해서 조용한 생활을 원하는 만큼 내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미셸의 이런 모습은 전통적인 부인상과 거리가 멀다. 남편의 일에 대해 제지하고 간섭하면서 남편을 끌고 가는 모습이다. 남편에 대한 평가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남편을 너무 신성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었다가는 금세 실망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다. 전통적으로 아내란 존재는 남편이 뭘 해도 다 사랑해주자는 식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아마 실제 결혼생활의 대부분이 나와 비슷할 것이다.”
“남편을 ‘메시아’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저 인간일 뿐이다. 다른 리더들처럼 보통 사람이라는 거다. 이 나라가 직면한 도전은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를 찾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전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직면한 도전은 이 사회에서 우리라는 개인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다.”
미셸의 말은 그녀가 얼마나 강한 자신감을 지닌 여성인지 짐작케 한다. 미셸은 선거운동 기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저는 뭐가 잘못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허비하기는 싫어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신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 우리가 이 비현실적인 기대에 못 미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상당히 실망할 테니 말이다. 그저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나 수다쟁이 맞다. 남편도 마구 괴롭힌다. 그이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명한데다 강한 여자도 아주 잘 다룰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대통령감이라는 거다. 나 같은 사람도 잘 다루는 위인이니 말이다.(웃음) …남편이 말을 잘한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허공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다. 각고의 노력과 얼마간의 눈물이 빚어낸 결과다. 누구나 변화를 달성하기까지는 힘이 든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자신이 쳐놓은 경계를 넘어서야한다. 두려움은 떨쳐버려야 한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 민주당의 일관된 메시지는 ‘가치의 정치’다. 대통령후보들은 기회, 책임, 공동체, 권한 같은 단어들을 자주 사용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때로 남성을 적대시하면서 ‘유리천장’을 깨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미셸은 미국 현대여성들이 생활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어떻게 소화하해내고 있는지 ‘생활인으로서의 영부인’모습을 보여준다. 모양이야 어떻든 이런 과정의 밑바닥에는 ‘우리는 할 수 있다, 예스 위 캔(Yes, we can)’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의 고취가 공통되게 관통하고 있다.
상대를 비난 않는 차분함
2008년 1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의 베네딕트 칼리지에서 그녀는 대다수가 흑인인 관중을 향해 ‘반대에 부딪힐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목표를 높게 가지라’고 외쳤다.
“우리 주변에는 회의론자가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 너는 훌륭하지 않아. 별로 똑똑하지 않아.’ 여기에 있는 여러분 모두 그런 말을 들었고 그런 것에 장벽을 느꼈을 겁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밀어 넘어뜨리고 여러분에게 한계를 지웁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의 키워드는 변화만이 아닙니다. 이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미국 전역에 저와 같은 반짝이는 불빛 수만개가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늘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지역사회에서조차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들으면서 자랍니다. 지금이 우리 모두가 그 반짝이는 불빛에게 다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 저는 누군가로부터 ‘너는 할 수 없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무시하고 과감하게 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강한 현실감각을 가진 미셸의 장기(長技)는 선거운동 기간 중 상대를 비난하지 않는 ‘차분함’으로 절정을 이뤘다. ‘래리 킹 라이브’ 인터뷰에서 매케인 후보가 버락을 ‘저 남자’라고 불렀을 때 불쾌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미셸은 “아니요”라고 답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후보들 사이에 오가는 공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이 경제를 어떻게 바로잡을지, 의료보장제도는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한 진실된 대답입니다.”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여성으로서 페일린이 부통령후보에 출마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비난을 삼갔다. 오히려 ‘그야말로 묘기를 부려야 하는’ 이 역할을 떠맡은 페일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 문제는 남편이 이번 경선에 출마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바로 모든 여성이 미셸 자신과 세라 페일린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때 너무 솔직한 화법으로 ‘오바마의 고통스러운 반쪽’ ‘불만에 찬 흑인여성’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던 미셸의 행보는 선거 막바지부터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은 지금까지 갈수록 빛을 발하는 흑진주를 연상케 한다.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미국 대통령사(史)에서 미셸의 정체성이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참고도서’
‘‘미셸 오바마’(엘리자베스 라이트풋 지음, 박수연 홍선영 옮김, 부키)
‘버락 오바마의 삶’(스티브 도허티 지음, 김혜영 옮김, 송정)
‘담대한 희망’(버락 오바마 지음, 홍수원 옮김, 랜덤하우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버락 오바마 지음,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
(끝)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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