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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26일. 최배달 Culture and Trend

1994년 6월 26일. 일본 황족이나 고위층만 사용할 수 있는 아오야마 장례식장. 5천여 명이 참석한 최배달 고별식에서 일본 역사상 최초로 한국어 조사가 낭독되었다.
“세계인을 경탄시킨 최영의는 일본에서 ‘오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였지만 재일동포들은 그가 ‘배달민족’의 ‘배달(倍達)’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생전에 친동생처럼 가깝던 서울특별시 극장협회 이창무 회장이 조사를 읽으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태권왕 최배달, 전설의 주인공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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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7살의 나이로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이름은 최영의. 민족혼을 잊지 않기 위해 ‘최배달’이라는 이름으로개명해 일본에서 활동했다. 결국 나이 40세가 되어 일본으로 귀화하기까지 ‘오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란 이름보다 더 잘알려진 이름은 최배달(倍達)이다.

현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과거 극장에서 ‘태권왕 최배달’이란 제목의 대한뉴스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정통태권도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태권왕’이라는 호칭으로 격파와 대결 등의 시범을 보여 주었다. 당시 극진공수도(가라테)의창시자로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탄탄한 조직을 두고, 그 단체의 총재로 군림하던 그가 왜 태권왕으로 고국을 방문했을까?

1966년 서울에 국제연맹(ITF)을 창설한 최흥희는 이듬해 태권도 전파를 위해 순회 차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동경을경유해 국내로 돌아오던 중 극진공수도를 창시한 최배달을 만나 한국 방문을 권하게 된다. 최흥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명성에힘입어 태권도의 보급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는 30여 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당시 불평등한 한일협정 체결로 반일정서가 높았고, 한국의 태권도 보급을 고려한그가 묵묵히 조국을 위해 ‘태권왕 노릇’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는 국제연맹과 교류를 통해 극진공수도와 태권도의 접목도 시도했다.

그러는 사이 국내 ‘태권도인의 밥그릇 챙기기’ 싸움을 보게 된 그는 진정한 무술 세계에 정진하는 한국 체육계에 실망을느끼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3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140여 국가에 2천 5백여 만 명의후진을 양성한 극진공수도의 전설적 인물이 되었다.
전라도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해 중학교를 다녔고, 그 후 도일해 일본 소년항공학교에 입학한 그가 왜 ‘전설의 파이터(전사)’가 돼야만 했을까? 그는 왜 끊임없는 싸움의 길을 택한 것일까?


투사 최배달, 한국인으로 살아남는 법

700kg 남부산의 황소와 싸우는 최배달, 세기의 대결을 보이고 있다. This

지난 2004년 7월, 최배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바람의 파이터’가 전국에서 상영되었다. 방학기 화백이 신문에 연재한 극화‘바람의 파이터’를 영화화 해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 영화를 보면 일반에 잘 알려진 유명한 일화 한 장면이 나온다.그것은 바로 최배달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읽고 입산수도에 정진하는 모습이다.
일본에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 1584~1645)는 무술기행을 하며 싸울 만한 상대를 찾아다닌 인물이다. 그러나실제 최배달은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이미 입산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최배달이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무술을겨룬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실상 그가 일본 전역을 돌며 무술기행을 시작한 것은 단순히 독서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인 최배달, 그가 설립한극진공수도 도장을 지키기 위해서다. 즉 주변 일본인들의 쉴 새 없는 견제와 방해, 끊임없이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도전장을던지는데 당당히 맞서기 위함이었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발행된 최배달 관련 서적은 60여 종이 넘는다. 거기엔 하나같이 미야모토 무사시의<오륜서>가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의 자문을 하고, 최배달 전기(『This is 최배달』. 찬우물 간)를 직접 쓴 세아들(최광범, 광수, 광화)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는 이미 전북 김제 용지소학교 시절에 고유무술을 익혔고, 서울에서 중학교를다니던 시절에 당수도를 배웠다고 한다.

1939년 야마나시 항공학교에 입교한 최배달은 ‘조센진’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일본인에게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며 강인한체력을 다졌다. 1941년 타큐쇼 대학에 입학한 그는 우연히 일본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나코시 기친(송도관창시자)’을 만나 그의 사설도장에서 2년 동안 가라테를 익혔다.

그는 또 그 무렵에 ‘미야기 나가토시(강유류가라테의 창시자, 현대 가라테의 원조)’의 제자이자 조선 사람이었던 조형주를 만나 강유류가라테를 익혔다. 실제 배달이 정식으로 무술을 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방황하던 최배달은 우연한 기회에 곤경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해주었는데 그가 지역 야쿠자보스였다. 별다른 호구지책이 없었던 그는 거기서 보디가드 역할을 하다가 야쿠자의 생활에 환멸을 느껴 다음해 제1차 입산수도를결행한다.

1947년 수도를 마친 최배달은 종전 후 처음으로 열린 ‘전일본 가라테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한다. 큰아들광범의 말에 의하면, 이때부터 최배달에게 싸움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온 청년이 전 일본을제패했으니 그 도전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제2차 입산수도에 들어간 최배달은 20여 개월 동안 피나는 수련을 쌓았다. 이제 무술 겨루기는 그에게 있어‘의무’가 아닌 ‘직업’이 되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찾아 나서서 싸우는 투사최배달이 된 것이다.


최배달 지론,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자세

실제 그의 싸움에 대한 지론은 간단하다. 그의 철학은 생활 속에 내재해 있는데, 자녀와 나눈 대화를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의 말년에 서울 대방동 자택에서 지내던 어느 날 둘째아들의 깜찍한 질문을 받는다. “아빠, 이소룡하고 아빠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 껄껄 웃던 그는 “이소룡은 체중을 더 늘려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또 하나, 셋째아들이 “가장 강한 무술이 뭐에요, 극진 공수도인가요?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어요”라고떼쓰자 “글쎄 가장 강한 무술이란 없다. 있다면 집에서 가까이 있는 도장의 무술을 배우는 것이 가장 강하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마지막 하나는, 최배달이 일본에 다녀오는 사이 대방동 자택에서 키우던 큰 셰퍼드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개를 좋아하는그를 생각해 아내가 비슷한 셰퍼드 한 마리를 사다 놓았다. 그가 집에 들어서자 셰퍼드가 날쌔게 덤벼들었다. 맏아들 광범은 이를지켜볼 수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개가 덤벼들었죠. 아찔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는데 아버지의 주먹에 목을 강타 당한 셰퍼드는 쓰러져 있었습니다. 정말 고개를 돌린 시간은 0.5초도 안 되었어요.”
잡초처럼 연마한 그의 무술은 정교한 테크닉이 아니라 강인한 체력과 자신의 의지력, 그리고 재빠른 속도(스피드)였던것이다. 그중 의지력을 가장 중요시했는데 그는 남들이 “최선을 다했다”라고 둘러대는 말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의 맏아들도대학입시에 떨어진 후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했다”고 말하자 최배달은 무척 섭섭해 했다.
그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훗날의 변명을 위해 남겨 놓는 얘기’에 불과한 말이다.그래서 그의 가라테가 극진공수도인 이유는 ‘다할 극(極), 참 진(眞)’자를 써서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것이 무술의 가장기본적인 태도라고 느끼고 추구하는 데 있다.

지난 2004년 7월, 최배달 전기출간 기념회가 열렸을 때 한 인사가 그곳에 참석한 최배달의 후계자 문장규(마쓰이쇼케이) 관장에게 물었다. “최배달 총재는 왜 그렇게 끊임없이 싸움을 하고 다녔습니까? (실제로 최배달은 1969년 47살의나이에 홋카이도에서 불곰과 대결을 펼쳤다) 극진공수도 총재에 취임하시고 그만 두어도 되었을 텐데….” 한참을 생각하던 문장규관장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저 자신도 이제 극진공수도가 운동이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실제로 생전의 총재님께 그와비슷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냥 껄껄 웃으시고는 운동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마 그분께서도 누구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목표나강박관념이 있기보다는 그 자체를 즐기고 만족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1960년대 ‘일본 청소년이 존경하는 인물 50명’에 꼽혔던 적도 있다. 이런 그에게 싸움의 이유를 묻는다는 것이 어쩌면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기무라 앞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뒤에 기무라 없다”라는 말로 유명한 일본의전설적인 유도왕 기무라 마사히코가 나중에 말하기를 ‘기무라’를 ‘최배달’로 바꿔야 한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겸양의 자세로 싸움을 통해 배움을 추구

“세상은 넓고 상수(上手)는 많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 내 선생이다.” 그가 생전에 자주하던 겸양의 표현이다. 말 그대로 그는싸움을 통해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했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힐러리 경에게 산에 왜 오르느냐고 묻자 “산이 그곳에있으니까” 라고 대답했듯이 “최배달도 살면서 왜 싸웠느냐”고 물으면 “상대가 그곳에 있었으니까”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최배달, 그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열도를 평정하고 세계를 무릎 꿇린 20세기 최고의무술인이다. 그는 오늘도 일본인의 성지인 삼봉신사에서 느긋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아들에게들려주었던 말을 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아들아,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거는 거다. 네가 하고자하는 일에 너를 바쳐라.”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은 자랑스러운 한국인” 전직 킥복싱 선수, 차남 최광수 씨 인터뷰

ⓒ뉴스한국

“아버지는 조선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죠. 하지만 조선 사람으로서 극진공수도를 크게 키울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 항상 고민했어요. 그것이 아버지의 최고 관심사였습니다.”
킥복싱 선수생활을 했던 최광수(30) 씨가 아버지 최배달에 대해 회상하는 부분이다.
그의 아버지 최배달(본명 최영의)은 현재 고인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맨손으로 황소를때려잡고, 세계 무술인의 도전에 무패신화를 창조한 초인적 무술가 최배달. 그는 2천 5백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극진공수도(극진가라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무용담은 지금까지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며 시대를 초월한다. 하지만 그의 영웅적인 면이 부각된 데 비해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 인천 주안역 부근에서 숙박업소를 하고 있는 최배달의 둘째 아들 최광수 씨를 찾아 생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역시 최고 무술가의 아들답게 운동으로 단련된 몸매를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고교 때 킥복싱 신인왕전 2등을 차지한 선수출신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교 1학년 때 의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미국 미시시피 국립대학에 재학했을 정도로 영특한 수재다. 그는 당당한 일면의 모습과 달리 장난스런 웃음을 내보이며 인터뷰에 응했다.

_ 최배달은 여론에 싸움꾼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자상하셨다. 가족만큼은 지극정성이었다. 태어나서 19년간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혼난 적이 없다. 일례로 형이 고교시절 싸우다가 상대 학생을 흠씬 두들겨 패서 정학을 당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혼내지도 않았고 그에 관한 말씀도 없으셨다. 61세 낳은 막내는 너무 “오냐, 오냐” 해서인지 철이 덜 들었다. 가끔 사고도 많이 낸다.
_ 최배달은 일본에 거주했는데 한국에 오면 주로 무슨 일을 했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오셨다. 대략 10일 넘게 지내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친구와 가족을 만나며 휴식을 취하셨다.

_ 본인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국에 오실 때 일본에서 발간된 <가라대바보일대> <대야마> 등의 본인행적이 담긴 만화책을 가지고 오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_ 최배달이 치열하게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일단 싸움꾼은 아니라고 본다. 극진공수도를 세계로 널리 알리려면 어쩔 수 없이 많은 도전에 응해야 했다. 전 세계에는각기 여러 종류의 무술이 있고, 또 지방마다 실정에 맞는 운동이 있다. 고도로 단련된 무술은 예술과 같다. 하지만 각동각처마다타 지역 무술이 개입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리고 나름대로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각지의 무술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아버지는 “증명되지 않은 것은 실현될 수 없다. 뭐든지 증명이 되고 실천되어야만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자신이 만든 무술을 세계화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투쟁이었다.
_ 산에서 무술을 단련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었나.
무술을 하기 위해 산에 들어간 것은 근본적으로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조선총련단’이라는 단체에 속해 있었다.당시 한국인 사이에 사고가 터지면 일본 불량배가 나서서 아버지를 문제 삼곤 했다. 그래서 조선인으로서 강해져야겠다는 마음을 품고속세를 떠나 산에 들어가 수련을 하셨다.

_ 평소 아버지의 대인관계는 어떠했나.
말 그대로 푸른 인간관계였다. 아버지는 사람들과 항상 가깝게 지냈다. 한국에 오면 항상 친구들에게 먼저 전화했다. “야,나 왔다. 지금 만나자.” 이러면서 연락을 취하고, 또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친한 친구 중 손진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예전에 일본에서 아버지와 동거 동락했을 정도다.

_ 아버지가 직접 싸운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싸움을 직접 본 사람은 가족 중 아무도 없다. 나는 아버지가 쉰아홉 살에 낳으셨다. 그 당시 극진회가 모든 체계를 갖추고있어서 특별히 싸울 필요가 없었다. 1920년대 당시에나 무술 시범이 많았다. 현재 일본에 있는 극진회관에서 그러한 싸움 관련자료를 볼 수 있다.

_ 극진공수도 후계자로 자녀에게 제의한 적 있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에 형은 재수생이었고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막내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가 너무 어려서그랬는지 말씀이 없으셨다. 평소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전부터 한국인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지금 일본 극진공수후계자도 재일동포다. 그분이 아직껏 잘하고 있다.

_ 최배달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사실 아버지의 일본 귀화에 대해 말이 많다. 나라를 팔아먹었느니, 매국노라느니 온갖 비방의 말이 오간다. 그러나 아버지는그런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 태생으로 일본뿐 아니라 세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특출한 애국자는아니다. 어떤 언론은 아버지를 과장되게 소개했지만 사실은 그저 평범한 한국인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항상 나라를 사랑했고, 고향김제를 잊지 않았다. 가족이 한국에서 살기를 원했고, 본인도 한국에서 정착하려 노력했다.
귀화하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었다. 아버지는 조선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조선인으로 극진공수도를 크게 키울수 없다는 부분에서 항상 고민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딜레마였다. 일본에서는 ‘오오야마 마쓰다츠(최배달의 일본이름)’ 하면영웅처럼 떠받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크게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극진공수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하는길을 선택했다. 필연적이었다. 그것도 일본의 거듭된 설득 끝에 마흔 살이 넘어서야 귀화했다는 사실이다.

_ 한국에 대한 아버지의 신념은 어떠했나.
아버지는 모든 음식 중 특히 어머니가 만든 한국음식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 생태찌개를 제일 좋아했다. 극진공수도를 알리기위해 필연적으로 일본에 귀화했지만 아버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다. 지금도 호적은 한국인이고, 그 가슴은 영원히한국인으로 기억되길 바랄 것이다.


덧글

  • 정승호 2009/03/14 20:30 # 삭제 답글

    저는정승호구요.
    죄송합니다.
    이름을속여서저는그냥평범한시민이구요.
    아무쪼록건강하시고요.
    모두모두화이팅정승호공식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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